연이어 찾아 온 미세먼지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고 있다. 봄은 봄이로되 진정한 봄은 오지 못하였다.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나 숨쉬기가 불안하고 어째 답답한 건 매한가지다. 세상이 발전하고 남의 장기를 떼어다가 이식도 하는 세상인데 그걸 어째 못하랴 싶기도 하다. 그렇다면 대기 질이 나쁜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 볼 수 있다. 그것은 그만큼 무엇인가 가동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. 공장이든 자동차든 화력 발전소든 말이다. 결국 인간이 만든 것에 인간이 당하고 마는 셈이다. 잘살기 위해서 편리하고 행복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인위적인 그 무엇이 이젠 인간을 공격하는 세상에 살게 되어버렸다. 이제 사람이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. 좀 더 편리한 것을 포기해야 하고 좀 더 돈을 써야 할지도 모른다. 이런 나쁜 공기는 가장 먼저 아기들에게 해롭고 어린아이, 임산부, 호흡기나 심혈관계 질환자에게 특히 문제가 된다 하니 이런 환경에서 애를 낳아 기른다는 게 얼마나 큰 모험이냐 말이다. 어른들은 낳으라 낳으라 하지만 기성세대 보다 배움도 많고 보다 현실적으로 직면해 있는 그들은 이미 알고 있다. 어른으로서 실로 많이 미안한 부분이다. 꽃 소식을 전
제각기 손을 흔들며 떠나고 있습니다. 한 대의 버스가 줄줄이 선 사람들을 싣고 어디론가 총총히 가버리듯이... 우리 집에서도 벌써 큰 아이가 대충 짐을 꾸려 타지로 가고 휑뎅그렁한 빈 방의 남은 옷가지와 몇 권의 책만이 한 사람의 부재를 알린 채 언제 다시 올까 주인을 기다리며 기다리고 있습니다. 그러나 이제는 다시 안 온다는 것쯤은 압니다. 졸업식장의 아이들도 그 자리에 그대로 지금처럼 다시 모이지 않을 것입니다. 지금 헤어지면 영원히 다시는 못 볼 친구들이 그토록 많으리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습니다. 늘 밝으시거나 혹은 꾸지람으로 눈물을 쏙 나오게 만드시던 선생님들! 내 옆자리 정님이, 가까웠거나 멀었거나와 크게 상관없이 이렇게 못 보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요. 내년에 봄이 또다시 온다고요. 아니에요. 아니지요. 내년에 오는 봄은 저기 저 나무의 이파리부터 가지마다의 개수부터 나무의 색깔까지가 똑같지 않으니 그렇게 똑같은 봄이 오는 건 아니란 말입니다. 가물거나 홍수에 태풍에 아니면 심지어 사람들의 장난으로부터라도 그만 변을 당해서 잘 보면 작년과 다르니까요. 여하튼 간에 마음에 깊은 애증을 갖지 않는 한 연연하지 않으렵니다. 그들은 그 나름대로 언제나 평화
현대사회에 있어서 ‘허기(hunger)’는 참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. 시장 자유주의 논리 위에 있는 세상은 오히려 화려함과 풍족하다는 말에 더욱 가까워 보인다. 그럼에도 빈곤과 부의 불평등한 분배에 관한 문제는 연일 쏟아져 나온다. 청년 실업률이 10%에 다다르고, 거의 4년째 2%에서 3%의 경제성장률을 보이는 지금,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은 경제적인 빈곤뿐만이 아니다. 한국 사회는 날이 벼려진 칼날 같다. 인터넷 기사에 댓글만 봐도 현 문재인 정부를 지나치게 미화하거나 혹은 과하게 깎아내리는 양상이 펼쳐진다. 중도의 온건한 온도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. 뿐만 아니라 유 튜브 홈페이지에서 가짜뉴스를 퍼트려 특정 사회정치적 성향을 옹호하거나 선동한다. 주 창윤의 <허기사회>는 과도한 흥분과 공분을 현대인의 정서적인 허기에서 찾고 있다.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에 일어난 급격한 경제 성장으로 사람들은 말 그대로의 배고픔에 더 이상 시달리지 않는다. 다만 이미 비어버린 밥그릇을 보며 끝이 없는 공허감과 보이지 않는 정신적 허기를 느낀다. 한 때 수많은 미디어는 ‘치유’, ‘힐링’의 코드로 콘텐츠를 만들어 낸다. 저자 주 창윤은 이런 상황을 ‘퇴행적